만자의 역사
고대에서 중세
만자 온천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구마시로 암굴’에서는 야요이식 토기 등의 출토품이 발굴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이 온천을 발견하고 이용했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전국시대 초기에는, 이 일대를 지배했던 하네오 일족이 만자 온천에서 탕치를 하는 사이에 과거에 성에서 쫓겨난 간바라 일족이 급습하여 이들을 멸족시켰다는 기록이 ‘가자와기’에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미 400년 전부터 상급 무사들이 이곳을 찾았었고, 만자 온천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 온천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
전국시대 후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는 이 지역이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만자에 관한 일화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는, 만자의 탕치 효과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아주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어서, 당시 먼 곳에서 탕치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가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만자 온천은 촌락의 공유 재산으로 이용되었고, 근대까지 좋은 온천을 의미하는 ‘비탕(秘湯)’으로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자노유, 이 온천은 심산유곡에 자리하고 있어 소나 말의 교통편도 없었으며, 사람의 왕래 역시 쉽지 않다. 온천수의 효능은 탁월하여 두통, 천식, 부인병, 산기, 명치 쓰림 등은 한번 온천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는 발병하지 않는다’
~‘가자와기’에서 발췌~
메이지시대 이후부터 근대
메이지시대 중엽에 들어서자 소규모 온천용 오두막이 곳곳에 있었을 뿐인 매우 소박한 온천장이었던 만자에도 온천욕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온천용 숙박시설의 건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만자 온천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관광 개발(1921년/만자 개발에 착수)을 통한 도로 정비와 스키장 등의 건설【1960년/만자 관광호텔(현 만자 프린스호텔) 개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역사가 알려주듯, 만자 온천은 대단히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뛰어난 전망과 대자연이 선사한 온천수라는 보물을 품고 있었기에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